농업인은 계몽 대상 아니다
농업인은 계몽 대상 아니다
  • 이나래 기자
  • 승인 2016.01.2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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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에서 최고가로 1만 2000원에 팔리는 토종꿀이 백화점 명품 코너에서 얼마에 팔리는지 아십니까? 무려 80만원입니다.”
지난 20일 서울 양재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2016 농업전망’ 대회 분과 토론실. 질의 시간에 누군가 위와 같은 분통(?)을 터뜨리자, 실내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는 자신을 (사)한국농식품6차산업협회장이라고 소개하면서 “대형 유통업체의 마케팅 전략에 정부가 놀아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요지는 이랬다. 질의가 있기 전, 대한상공회의소 소속 농식품상생협력추진본부 신우식 박사가 ‘사례로 본 농식품 상생협력 패러다임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발표했다. 요약하면 ‘대기업이 최근 농식품 시장에 눈을 뜨면서 우수 농업인을 발굴, 농업과 유통업이 윈윈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는 내용이다.
최근 이마트가 농식품부와 함께 ‘국산의 힘 프로젝트’를 추진, 우수한 국산 농산물의 선별부터 판매까지 적극 뛰어든 것이 그 예이다. 또 우수 농산물을 선별해 고가에 판매하는 현대백화점의 ‘명인명촌’ 브랜드도 예로 들 수 있다.
쟁점은 백화점 고급 농산물(가공품)의 경우, 과연 농업인에게 얼마의 이익이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벌꿀 ‘폭리’를 문제 삼은 김성수 6차산업협회장은 고가의 판매액 중 과연 농업인의 몫은 얼마냐며, 정부가 상술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마트 ‘국산의 힘 프로젝트’ 대상농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또다른 농업인은 “나는 매출이 상당히 증가했다”라고 반박(?)했지만, 서민 중심인 이마트와 백화점 명품 브랜드는 각각 지향 고객이 다르니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이번 사례를 보며, 정부에 대한 농업인의 뿌리깊은 불신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정부도 대기업에 ‘놀아나려고’ 정책을 입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꼴이 될 수는 있어도 말이다.
문제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한 우리 농업인들의 불신이 너무 만연하다는 것이다. 언론에는 FTA에 결사 반대하며 시위하는 농업인들, 쌀값이 폭락해 못살겠다고 부르짖는 농민들의 모습이 종종 비친다. 물론 많은 농업인들이 FTA ‘알레르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농업인들을 만나보면 “살기가 힘든 건 맞지만, 농산물 개방은 옳은 방향이다”, “ICT 시설이 고장났을 때 정부한테 무상으로 고쳐달라는 게 아니다. 고장 즉시 고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 등 현실적인 의견을 밝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업 유관기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
농업인의 이러한 정부 불신의 배경에는, 농업인을 아직도 계도나 지원의 대상으로만 보는 정부의 인식이 일조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취재를 위해 공무원을 만나다 보면 “농업인이 필요한 걸 정부가 일일이 지원해 줄 순 없다” “(농민들이) 편하게 농사 지으려고만 하지말고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등 다양한 설명을 듣곤 한다.
물론 일부 공무원들의 설명이 곧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모여 결국 정부 조직을 이룬다.
정책 고객인 농업인을 존중하긴커녕, 보조금이나 바라고 계몽이 필요한 대상으로 본다면 곤란하다. 무엇보다도 ‘편하게 짓는 농사’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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