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연구,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다 (1945∼1969)
학문, 연구,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다 (1945∼1969)
  • 농업정보신문
  • 승인 2015.11.1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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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배농촌진흥청토양비료과장

토양비료 연구 측면에서 보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중앙농업기술원 소속 중앙토양연구소를 두어 토양에 대한 조사, 시험, 연구, 분석 및 토양도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다.
한국전쟁 당시 모두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도 고령의 어수진 선생은 수원에서 은거하면서 토성조사성적 서류함을 온전히 지켰으며, 토양분석용 백금도가니도 우물 속에 감추었다가 수복 이후 꺼내어 다시 사용했다고 한다.
전란의 어려움 중에서도 공직자의 임무를 다한 토양비료 연구자의 모습이었다.
1957년 농사원이 발족되었고, 농업시험장 산하에 토양과가 신설되었다. 당시 미국 고문관들과 우리 측이 협의하여 산성토양개량사업, 작물 및 토양관리사업, 토양검정사업 등을 추진했다.
1962년 농촌진흥청이 발족되었고 FAO측 전문가를 설득하여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농경지 비옥도를 평가하고 작물 수량을 증대시키는 비료사용 기술도 개발했다. 지력증진법도 1965년 제정했고, 퇴비증산을 통한 땅심살리기에 너도나도 참여했었다.
또한 1964년 농촌진흥청과 UN이 공동 출연으로 1969년까지 전국 984만 7천 ha의 토양조사를 마치고 1:50000 축척의 토양지도도 구축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16명의 토양과 비료분야 전문 인력이 확보된 결과, 1968년 6월29일 한국토양비료학회도 탄생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으로 탄생된 자작농들의 교육열기로 자라난 젊은이들은 훗날 서독 광부나 간호사로 파견되고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도 참여하여 나라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1960년대 건설된 비료공장은 농지생산성 향상과 비료산업발전에 기반이 되었다.
또한 1962년 발족된 농촌진흥청은 1:50000축척의 토양정보를 구축했고 작물 수량을 증대시키는 비료사용기술도 개발 보급하여 식량자급에도 기여했다.
이같은 토양비료 분야 전문 인력이 양성과 비료산업계의 활성화로 한국토양비료학회도 탄생되면서 바야흐로 토양비료 분야 제도, 학문, 연구 산업 발전의 기틀을 다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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