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연구,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다 (1945∼1969)
학문, 연구,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다 (1945∼1969)
  • 농업정보신문
  • 승인 2015.11.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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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여정, 토양비료 70년 역사 ①
이덕배농촌진흥청토양비료과장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에너지는 인력(人力)과 축력(畜力)이었다.
그 시절 농산물은 국가적으로 물품생산, 군사, 교통에 필요한 인력과 축력을 얻게 해주는 에너지원이자, 주요 조세원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식용품은 물론 의류와, 의약품을 공급해주었기에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至大本也)라고 하였다.
하지만 농업의 중요성만 강조되었을 뿐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는 관심이 적었다. 더구나 자기 땅도 없이 대지주의 땅을 빌려 뼈 빠지게 농사를 짓고서 소작료를 낸 농민들이 생계가 막막하여 노비로 전락하거나 유랑하다 민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농업이 활성화되어야 하기에 다산 정약용은 편하게 농사짓는 것(便農), 농업에 이득이 있는 것(厚農), 농업의 지위를 높이는 것(上農)이라는 의미의 3농 정책을 피력하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과 일본계 회사의 재산은 미군정하의 신한공사로 몰수 되었고,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다.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소작농(小作農)들은 유상으로 분배받아 자작농(自作農)이 되었다.
다소 경제력이 생긴 자작농은 가난의 대물림을 청산하고자 자식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아 길러진 수많은 인재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한편 1950년 12월 1일 유엔총회에서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이 발족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업시행이 지지부진하다가 한국전쟁 휴전이후 수리조합연합회, UNKRA, UN군사정부 간에 식량증산 및 수리시설 복구를 위한 원조협정을 체결하고 수리조합 기자재를 지원하였다. 하지만 본 사업은 자금조달문제로 1958년에 중단되었다.
한편 해방이후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비료도 1961년 충주비료공장을 필두로 1962년 나주, 1967 울산, 진해에 비료공장이 들어서면서 이후 질소질 비료의 자급자족을 달성하게 되었고, 비료를 활용한 작물 생산성 향상 기술의 개발과 보급이 가속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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